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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2020년 마음의반 기록하기

티타임


아이들과 편안하게 수다를 떨고 싶었다. 수업시간엔 주로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자기 놀기 바빠서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몇 마디 하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됐지?” 한다.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어떤 고민이 있거나 심심해서인데, 고민 말고, 누가 뭘 잘못했는지 이르는 말 말고, 편안한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티타임을 계획했다.     

 

티타임을 하기로 한 전날 집에서 찻잎을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말린 꽃잎, 제주도에서 만만이가 사 온 말린 귤차, 대만에서 유명한 밀크티, 그리고 혹시라도 준비한 차를 다 싫어할까 봐 평범하고 익숙한 옥수수수염차도 준비했다. 찻잔도 준비하고, 주전자도 준비했다. 테이블보까지 준비하니 이런 내가 낯설 정도였다. 내가 테이블보라니. 한 보따리를 준비해서 현관 앞에 놓았다. 기대되고 설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14명이니까, 한 번에 14명 아이들과 티타임을 가지면 분명 시끄러워질 것이 뻔해 모둠으로 쪼개 티타임을 했다. 어제 4명을 먼저 만나고, 오늘은 3명을 만났다. 차를 마실 거니 집에서 컵을 가져오라고 지나가듯 말했는데 모두 기다렸다는 듯 집에서 자기 컵을 준비해 왔다. 아이들이 준비물을 잘 챙겨 와서 너무 놀라웠다. 아이들도 티타임을 기대했을까?     

 

어제 티타임에서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게 벌써 소문이 났나 보다. 오늘 만나기로 한 아이들이 ‘티타임’ 말을 듣자마자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약속시간을 정했다. 점심시간인 1시에 상담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한테 전에 같이 이야기했을 때 했던 느낌 카드도 꼭 챙기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오늘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한 아이들은 모두 여자아이였다. 재잘재잘 수다 떠는 걸 좋아해서 이 친구들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 심지어 수업시간에도 수다를 떤다. 어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말이 끊이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나는 1시가 될 때까지 교사실에서 좀 쉬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점심을 다 먹자마자 상담실에서 나를 기다렸나 보다, 1시가 되기 10분 전 교사실로 와 왜 오질 않느냐고 대뜸 물어본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웃는다. 나랑 아이들이 느낌 카드랑 찻잔을 챙겨 상담실로 올라갔다.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누가 코딱지를 파서 먹은 이야기

할머니가 찻잔을 선물로 준 이야기

쉬는 시간에 매트로 논 이야기

교사실에 인형이 있었던 이야기

내가 가져온 캐리어로 여행 놀이 상황극

등등등...     

 

자기들끼리 이렇게 신나게 이야기 할거 면서 나를 왜 불렀나 싶을 정도로 즐겁게 이야기하길래 나는 그냥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냐 한 아이가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차 주세요~” 한다.     

나는 그제야 아이들에게 무슨 차를 마실 거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옥수수수염차를 마시겠다고 했다. 내가 가져간 꽃잎차나 다른 찻잎은 냄새가 고약하다고 했다. 아이들이 선택한 옥수수수염차를 주전자에 넣고 시원한 물을 부었다. 다행히 시원한 물에도 잘 우러났다. 차가 우려 지는 동안 내가 테이블에 느낌 카드를 깔아 놨다. 지금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봤다. 아이들은 느낌 카드를 가지고 또 자기들끼리 실컷 놀다가 지금 느낌에 대해서 몇 장씩 골랐다. 내가 왜 이런 느낌이 드냐고 물었다.     

 

“기대되기도 하고, 이렇게 차 마시자고 해줘서 고마워.”
“행복해요. 이야기하는 거 재밌거든요.”

 

“나는 기대가 되고, 설레기도 하고, 좋아!”     

 

아이들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나랑 이야기를 나누는 게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고맙고 그럴까? 나는 좀 얼떨떨했다.      

 

차가 다 우려 지고 아이들 컵에 조금씩 따라주었다. 아이들이 더웠는지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셨다. 차를 마시고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서울 살고 우리 부모님은 안산에 사시는데...”     

 

이 한 문장을 말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또 자기들끼리 서울은 어떻고 자기 고향은 저쩌고 말을 한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지금은 내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하는 시간은 아니니까 나는 그냥 아이들이 하는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듣겠노라고 작정했기 때문에, 내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를 해도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한 아이가 나한테 “그래서요? 이야기마저 해줘요”라고 드디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안산 집에서 겪었던 일을 좀 과장해서 들려줬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내 작은 행동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리액션이 좋은 아이들이어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아주 쏠쏠했다.      

 

내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들이 해주는 무서운 이야기도 들었다. 한 아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기를 짓고 전달하는 능력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평소 수업시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어내는 이야기라고 처음부터 아주 당당하게 말했는데도, 디테일한 묘사와 실감 나는 표정연기로 아주 심장이 쫄깃했다. 나는 이야기를 다 듣고 그 아이에게 나중에 소설을 써 봐도 좋겠다고 했다. 아이가 싱글벙글 웃었다.     

 

다음 주 월요일 우리 반 아이들이랑 다 같이 티타임을 하려고 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편안하게 앉아 수다를 떨지 못하고, 차를 같이 마실 때 필요한 예절에 대해서 말해주겠지만, 이렇게 삼삼오오 모여서 차를 마시면 아이들에게 있던 내가 몰랐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티타임을 마치고 교사실 내 자리에 앉아 얼른 매실액을 주문했다. 시원하게 마시면서 이야기하는데 매실액이 딱이다. 꽃잎은 다시 집에 가져가져 가고 집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숫가루도 좀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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