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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박재연/리플러스 소장]비전과 소통_관계를 좋게 맺는 방법



#사과


사람들은 실제로 미안한데 왜 사과하지 않을까? 자기 합리화, 자기 기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를 잘 속인다. 회사를 다닌데 야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을 타면 50분을 쭉 가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딱 한 자리가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앉는다. 너무 피곤하면 집까지 갈 때 어떤 분은 핸드폰을 볼 수도 있지만 너무 피곤하다면 눈을 감고 잘 준비를 한다. 눈을 감고 잘 준비를 하는데 다음역의 문이 열리고 노쇠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온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잠이 들까? 잠이 약간 깰까? 잠이 약간 깬다. 그 이유는 그 때 우리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윤리’가 있다. 마음 속의 ‘자기 윤리’가 말한다. ‘할머니야. 일어나.’ 그런데 한 편에서는 또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일어나기 싫다. 나 자고 싶다.’ 그런데 이 목소리가 이긴다. 이 목소리가 이기면 우리는 자기 배신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의 행동은 안 일어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한다. 그런데 잠이 바로 올까? 그렇지 않는다. 마음속에 미안함이 올라온다. 미안함, 죄책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 죄책감을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있다. 실눈을 뜨면서 나보다 어린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요즘 애들 왜저래’ 라고 욕하면서 자버린다. 내가 이 죄책감을 처리해야 편안한데 사과하고 싶지 않으면, '어쩔수 없었어' 라는 말로 합리화를 시킨다. 리더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게 있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어떤 합리화에 빠져있었는지, 또 반대로 미안하지 않은 상황에도 얼마나 많이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진짜 미안한 일에는 미안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미안하지 않은 일에는 미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합리화 해왔는가 생각해보자.

예시) 팀장이 휴가 가는 과장에서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고 가라고 했다. 과장은 휴가에 갔고, 팀장은 메일함을 확인했는데 자료가 오지 않았다. 과장에게 전화해서 한바탕 화를 냈다. 과장은 메일을 보냈다고 하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스팸메일에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 회사 메일로 보내지 않은 과장 탓을 했다.

하루에 한 번씩 내가 합리화 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합리화는 나를 방어하는 수단이다. 그렇지만 내가 회고해 볼 때 내가 미안한 일이었다면 솔직하게 말해보자. 그런데 왜 그랬냐면…. 이 말만 안붙이면 된다. 사과를 할 때 합리적으로 사과하려고 이유를 설명하지만,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이유와 설명에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이는 ‘내가 그 일에 후회해. 미안해’라고 말해야 한다. 만약에 그 사람이 왜그랬냐고 물어보면 그 때 잠깐 설명할 순있다.


#칭찬


사람들은 상사에게 들었던 칭찬들을 이야기 할 때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왠지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했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이 훨신 더 파워풀하다. ‘잘했다’는 칭찬은 평가자가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 비교를 통해서 칭찬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떨까. 감사에는 비교가 필요 없고 판단이 필요 없다. 고마운 점만 말하면 된다.
감사는 나눈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내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나도 당신의 삶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같이 기뻐합시다.’라는 것이 감사의 의미이다. 상대방과 그 때를 여행할 수 있도록 상황을 이야기 하며 감사하자.


#부탁


우리는 살면서 부탁 잘 할까? 조직에서는 요청, 지시, 강요가 많다. 부탁을 잘하는 사람은 많이 못봤지만 나이스한 강요를 잘 하는 사람은 많이 봤다. 이것이 부탁인지 강요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끝나고 남아서 10분 정도 정리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으세요?라고 물어본다면 말하는 사람은 똑같이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요청으로 들을 수도 있고 지시로 듣기도 하고 강요로 듣기도 한다. 하지만 말하는 이의 의도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대화를 더 이어가면 알 수 있다.

상대방에게 거북스러움을 주고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준다면 이것은 강요일 것이다.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에게 불이익이 올 것이라고 느끼게 되면 이것 또한 강요이다.
죄책감을 활용하는 것도 강요다.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들어서라도 에스를 받아내는 것 또한 강요이다.

우리는 평소에 강요를 듣고 사나, 요청을 듣고 사나. 우리는 강요를 많이 하나, 요청을 많이 하나. 부탁하지 않는 것도 강요다. 부탁하지 않는사람은 속으로 말한다. ‘내가 하나 안하나 봐야지.’ 그리고 요청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절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남한테 폐끼치고 싶지 않아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거절 당하기 싫어서, 능력있는 사람이고 싶어서, 이러고 저러고 보니까 습관이 안되서이다. 요청의 연습은 나의 삶에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좋다. (예, 네일아트/음식점에서 반찬 더 달라고 하기) 요청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관계가 틀어졌을 때 관계를 회복하는 것 하나가 ‘부탁하기’이다. 작은 부탁을 하는 것이다. (예, 친구에게 노트빌리기) 그리고 상대방에게 정말 고맙다고 표현하면 상대방은 누군가를 도와준 것 같아서 기쁘고 감사를 들어서 기쁘다. 이것은 벤자민 프렝클린 효과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관계가 멀어졌다면 그 사람이 쉽게 해줄 수 있는 부탁을 하고 그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라. 그러면 그 사람은 기쁨으로 화답한다. 부탁이 그래서 중요한다. 용기를 내어야 부탁을 할 수 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는 뇌손상이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번 해보는 것이다. 내가 요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서


누구나 받고 싶어 하면서 누구나 하기 힘든 것이 용서이다.
용서는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