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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줍줍/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4. 상상력_다윗과 골리앗

|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져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다윗은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아무런 은폐물도 없이 노출된 채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계곡은 온통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모두가 창을 들고 있거나 칼을 갈고 있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쳐죽일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위험은 생각하지도 않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었다. 계곡의 양쪽에 서 있는 더 구인, 블레셋 쪽의 골리앗, 이스라엘 쪽의 사울 사이에서 다윗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동화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에 맞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이야기 속에 새로운 경험과 통찰을 가져오면, 그 이야기는 그만큼 더 풍성해져서 신선한 이야기가 되어 다시 우리 삶에 풍성함을 가져다 준다.
많은 성인의 삶을 매우 빈곤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어린이 이야기의 부재, 즉 더 이상 동화를 읽지도 않으며 들려주지도 않으며 듣지도 않는 것이다.

​#성인 이야기로서의 동화
아동기는 세계의 근본을 알아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동화에서 출발한다. 동화는 우리로 하여금 먹고 자며, 걷고 뛰며, 놀고 일하며, 싸우고 사랑함, 욕하고 축복하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근본에 접근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탐험가이고 모험가다. 모든 어린이가 콜럼버스, 마르코 폴로, 갈릴레오 그리고 다윗이다. 세상은 너무도 넓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ㅗ고 맛보고 들을 것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바위와 동물, 풀잎과 꽃을 발견한다. 여러 다양한 생김새를 보고 마냥 신기해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부모들이 이러한 탐구와 발견을 북돋우기 위해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준다.
우리는 이러한 탐구의 과정에서 세상에는 크기와 모양, 색깔과 질감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즉 의미와 목적, 선과 악이 있음을 배우게 된다. 모든 것의 표면 뒤에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큼, 어쩌면 그것들보다 더 실제적인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이야기는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용납과 거절 사이의 긴장을 알아보고 탐구하는 상상력을 성장시킨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삶 가운데 펼쳐지는 장소는 바로 우리가 왕업을 수행하기를 배우는 우리의 일터다. 다윗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이 골리앗에게 사로잡히는 대신 하나님께 사로잡히기를 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골리앗에게 압도당했다. 그들은 골리앗을 쳐다보느라 상상력이 피폐해졌기에 동생의 우애조차 보지 못하고 반길 줄 몰랐다. 악에 의해 우리의 상상력이 지배당하고 우리의 사고 방식이 좌우되며 우리의 반응이 결정되는 순간, 우리는 선한 것과 참된 것과 아람다운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에게 사로잡힌 상상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가지고 엘라 골짜기에 등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골리앗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윗이 보기에 그가 관계를 맺어야 할 실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다윗이 알고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는 거인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그는 양을 지키며 사자와 곰과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허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연습해 온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자의 포효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시냇가에서 무릎 꿇기
그는 돌 다섯 개를 고르기 위해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전에 시냇가에 와 본 적이 없었는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은 걷거나 뛸 수 없다. 무방비 상태가 된다.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사울의 갑옷
사울은 다윗을 돕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했다. 갑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무기를 드는 것이었다.
어떤 아마추어가 전문가들이 주름잡는 영역에 들어가고자 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돕겠다고 나선다. 갑옷을 입혀 주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비를 갖다준다. 그리고 충고를 해주고 지침을 준다. 이들은 진정으로 나를 염려해 주는 사람이며 나는 그런 애정에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그 조언으로 해보지만 얼마 못 가 도무지 움직일 수 없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자신에게 맞는 무기였다. 아이작 페닝톤은 이렇게 외치곤 했다 “당신을 인도해 줄 무언가가 당신 가까이 있다. 그러니 부디 그것을 기다리라. 그리고 꼭 붙들라.
다윗은 사울의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간단한 차림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엘라 골짜기로 걸어가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우리의 무릎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저 관습적으로 남들을 따라 살 것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령님이 기름부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신 존재로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전문가들에게나 기대고 의지하며 살 것인가? 골리앗 공포증과 하나님, 둘 중의 무엇이 우리 삶의 행로를 결정짓게 할 것인가? 사울을 올려다보며 살 것인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위기의 순간
우리는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듯이 하나님 믿기를 배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일은 말하고 걷는 것만큼 중요하며,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의미 있으며 가장 인간적인 일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공적이며 가장 사회저기며 가장 정치적인 일이기도 하다.
세상은 변한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며 자신의 백성을 택하신다. 듣는 자 누구인가? 알아보는 자 누구인가? 반응하는 자 누구인가?
시냇가에서 느긋하고 평온하게 무릎 꿇은 다윗은 우리에게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상상력을 통계 수치 따위와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다윗은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해 준다.

​#달려가는 다윗
이제 다윗은 더 이상 무릎을 꿇고 있지 않다. 다윗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도망쳐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인을 향해 돌진해 가는 것이다.
다섯 개의 매끄러운 돌 중 한 개가 세차게 날아가 블레셋인의 이마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거인은 정신을 잃고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곧 목숨을 잃었다.
그 날 현실을 완전히 직시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다. 그날 엘라 골짜기에서 정말로 인간다웠던 유일한 인간은 바로 다윗이었다. 현실은 대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윗의 인간됨이 강하게 발휘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그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