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가복음 10:35-37, 42-43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째서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가복음 2:15-17)
다윗의 광야 생활 중에 일어났던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너무도 뜻밖인 ‘최고’는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교회와 같은 공동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다룰 ‘최고’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이름을 가진 구체적인 것이다.
아둘람 굴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는 첫 번째 모습이다. 전에는 서로 맞지 않는 형제들이었으나, 고통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그들이 오자 다윗은 곧 부모님을 모압 땅으로 모셔 왓고, 광야 시절 내내 거기서 그분들을 돌보아 드렸다. 본문에는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다윗의 형들도 분명 계속 그와 함께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은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들을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은 압제 받고, 빚에 시달리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들이었다.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들, 거절당하고 실패하고 탈락한 자들이었다.
다윗은 광야에서 10년을 이런 이들과 함께 보냈다. 그들은 함께 먹을 것을 구하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웠다. 사랑받지 못했고 또 사랑스럽지도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놀라울 만큼 사기 충천한 집단이었다. 역대상 12장에 정리된 개괄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사기 충천한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있는 지평까지 뻗어서,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로 이루어진 그 집단이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백성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그들의 정체성은 그들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또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보통 하나님은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신자, 제자, 예배자의 공동체를 만드신다.
하나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문화적 정치적 엘리트들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비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며 그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 사역을 펼처 가셨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 안에 숱한 혼란과 불만족, 당혹스러움과 물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영성 생활에서 가장 많은 실망과 불만족이 생겨나는 영역은 바로 이 공동체 경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들어가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사람들이 서로 남의 일을 가지고 수군대는 모습을 발견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를 읽고는 의를 향한 내면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깊은 갈망에 사로잡히지만, 교회는 우리에게 아기 봐 주는 봉사 위원회 일을 맡기려 할 뿐이다. 교회를 나와 버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교회는 싫어요.”
북미 교회가 이렇게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향해 향하는 가장 일반적인 대처 방법은 홍보 활동과 전문적 무대 공연을 통해 ‘교회’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는 종종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과 정신은 판매 활동이나 멜로 드라마 세게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사기꾼과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꿔버릴 참인가? 이 문제에서 바울은 훨씬 더 현실적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헤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광야 영성은 우리가 보통 때라면 결코 사귀려고 하지 않았을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일을 포함한다. 이들은 대개 근사한 사람들이 못 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다윗이 그랬다. 예수님도 그랬다. 바울도 그랬다.
가드의 아기스
다윗의 공동체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노라운 사실이 있다. 바로 600명까지 불어난 그 공동체가 가드의 아기스 왕과 고용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전에 홀로 망명했던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블레셋 왕이다.
윌터 브루그만이 말하듯이, “지금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밑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주제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지극히 의도성이 강한 작품을 대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에 있든 여호와는 그와 함께하신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소위 ‘영적인 삶’에 전혀 적합하지 못한 환경에서 최선을다해 살아 남는 것 말이다. 그래서 그는 아기스 왕에 대해 분개하지 않았고 야만적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블레셋 문화에 맞서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신의 기름부음에 충실하도록 그를 지키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신다.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가이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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